매일경제 기사보기

보수층도 “분배 신경써라”…美는 금융위기후에도 성장 요구

보수 69% “기업규제는 공익에 도움돼”
20대와 60대 이념차이 커…日의 19배

◆ 대한민국 이념지형 심층분석 ① / 경제 포퓰리즘에 빠진 대한민국 ◆

 기사의 0번째 이미지
한국은 보수마저도 성장보다는 분배를 요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수는 성장, 진보는 분배’로 대변되는 전통적 이념 지형에 지각변동이 일어나면서 보수와 진보 모두 한목소리로 분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한국의 보수는 재벌로 대표되는 대기업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보수와 진보 모두 정부가 기업을 규제하고 기업의 이익을 줄여 분배를 늘려야 한다고 보고 있는 셈이다.

한규섭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한국은 저성장 추세가 지속되면서 보수도 경제 성장을 포기하고 분배를 요구하는 경향이 짙다”며 “전 세계적으로도 한국에서만 뚜렷하게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매일경제신문과 서울대 폴랩(Pollab) 한규섭 교수 연구팀이 지난달 29~30일 리얼미터에 의뢰해 만 19세 이상 남녀 105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보수 응답자의 68.6%는 ‘기업 규제는 공익에 도움이 된다’고 대답했다. 이는 진보 응답자 가운데 75.6%가 기업 규제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한 것과 비슷한 수준이다. 이는 보수와 진보 모두 한국 경제가 대기업에 유리하고 일반 국민에게 불리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번 조사에서 ‘한국 경제가 대부분 국민에게 공정하다’고 대답한 응답자는 보수조차도 16.8%에 그쳐 진보(11.0%)와 큰 차이가 없었다.

이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은 개인의 노력으로 부를 창출할 수 있다는 신뢰가 매우 낮았다. 이는 보수와 진보 모두 ‘개인의 노력→기업 경쟁력 강화→국가 경제 성장→소득 증대’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믿지 않고 기업만 곳간을 채우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번 조사에서 보수 72.8%, 진보 83.8%는 ‘기업 이윤은 공정하고 합당하지 않으며 너무 많다’고 대답했다.

보수도 기업 활동을 부정적으로 보면서 정부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뤘다. 이번 조사에서 보수의 89.4%는 ‘정부가 기업과 개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이는 진보 가운데 89.0%가 찬성한 것보다 많다.

이번 조사에서 보수 75.2%는 ‘기초생활을 보장하지 않으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어 정부가 복지를 늘려야 한다’고 응답했다.

이정희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에 대해 “촛불집회 이후 야권뿐 아니라 보수 진영에서도 보편적 복지와 재벌 때리기 등 국민이 원하면 뭐든 들어주겠다는 식의 행태가 나오고 있다”고 분석했다.

 기사의 1번째 이미지

사진설명한 달 전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던 여의도 국회에 대형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다. 태양을 가리는 구름과, 삭풍에 펄럭이는 태극기가 진보와 보수 이념 대결로 혼돈에 빠진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이충우 기자]
사회 이슈의 경우 ‘포용’을 강조해야 할 진보 진영은 국내에서 이민자 수용, 동성애 인정 등 민감한 이슈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 다수인 것으로 나타나 눈길을 끌었다. 이번 조사에서 보수의 62.4%와 진보의 62.0%는 ‘이민자 수용이 전통 가치와 관습을 위협한다’며 부정적으로 봤다. 또한 진보의 65.6%는 사형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58.3%는 동성애를 막아야 한다고 봤다. 한 교수는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은 진보가 동성애를 허용해야 한다고 보는데, 한국은 보수와 진보 모두 반대하는 것이 특이한 지점”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미국의 경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에도 보수는 기업 활동을 촉진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저성장 국면이 지속되면서 보수조차도 봇물처럼 복지를 요구하는 한국과 대조를 이루는 부분이다.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가 2011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중 보수 71.2%는 ‘기업 규제는 공익에 해롭다’고 했다. 이는 진보 75.2%가 기업 규제에 긍정적이었던 것과 대비된다.

또한 미국 보수 응답자 60.2%는 ‘기업 이윤이 공정하고 합당하다’, 76.0%는 ‘복지는 가난한 사람의 의존을 높여 부정적’이라고 답했다. 이는 2011년 벌어진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 와중에 이뤄진 조사인 것을 감안하면 당시 미국 보수는 사회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기업 활동 촉진을 지지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20대와 60대 사이 이념 차이는 한국이 비교적 큰 나라로 조사됐다. 이념 성향을 ‘-100(진보)~100(보수)’으로 산출해 조사한 결과 한국은 미국, 일본, 독일, 스페인, 스웨덴 등 5개국과 비교할 때 세대 간 이념 차이가 가장 컸다. 이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의 20대와 60대는 이념 차이가 22.9에 달해 가장 차이가 작은 일본(1.2) 보다 19배 컸다. 또한 한국은 스페인(15.3배), 독일(8.2배), 스웨덴(3.7배), 미국(2.9배)보다도 세대 간 이념 차이가 큰 나라로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