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 슈퍼컴 개발에 거는 기대
이재진 서울대 매니코어 프로그래밍 연구단 단장

정부의 차기 슈퍼컴퓨터 도입과 자체개발을 위한 사업이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했다. 자체개발은 신청한 예산보다 훨씬 작은 예산이 통과돼 아쉽지만,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해 중요성을 인정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슈퍼컴퓨터 기술은 ICT 분야의 기반기술이고, 타 과학기술 분야의 발전을 가능케하는 기술이다. 현재 떠오르고 있는 빅 데이터 및 딥 러닝의 배경에 슈퍼컴퓨터가 있다. 또 큰 분자의 화학반응을 슈퍼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하는 프로그램인 ‘CHARMM’을 개발한 과학자들이 2013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슈퍼컴퓨터 기술이 가장 앞선 미국, 일본, 중국의 경우 이제까지 풀지 못하던 대용량의 계산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슈퍼컴퓨터를 정부주도 사업으로 개발해 왔다. IBM, 후지쯔, 크레이 등 이 사업에 참여하는 회사는 개발한 원천기술을 서버 등으로 이전해 상용화 한다. 새로운 시장을 연 애플의 아이폰도 슈퍼컴퓨터 기술이 이전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폰의 하드웨어, 운영체제 및 컴파일러 등의 시스템 소프트웨어는 원천성 면에서 크게 새로울 것이 없지만, 미국에 탄탄하게 축적된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원천기반 기술과 고급인력이 아이폰 탄생의 바탕이 됐다. 국내 기업이 빠르게 위기를 극복하고 기술을 따라잡을 수 있었지만, 외국의 한 기업이 개발한 공개 소프트웨어가 우리나라의 스마트 폰 산업을 살려준 느낌을 아직도 버릴 수가 없다.

ICT 강국이라고 불리는 우리나라가 아이폰 쇼크를 겪었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이다. 분야를 선도하는 원천기술이 아니라 이미 상품화 된 추격기술에 정부가 지속적인 연구비를 투자했다는 것이 그 첫 번째 이유이고, 이 때문에 문제 해결 능력이 있는 고급인력이 양성되지 못한 것이 두 번째 이유다.

슈퍼컴퓨터 자체개발 사업이 성공하려면 연구개발의 본질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기술을 연구개발한다는 것은 남들이 이미 한 것을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가 같더라도 처음부터 차별성과 영속성이 있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정부는 기술 전환기의 기회를 이용해 추격기술이 아니라 세계를 선도할 수 있고 세계와 경쟁할 수 있는 차별화된 기술개발을 목표로 해야 한다. 이제 막 떠오르고 있는 CPU와 가속기(GPU, FPGA 등)를 혼용한 이종 시스템은 CPU만 사용한 동종 시스템보다 쉽게 고성능과 저전력소모를 달성할 수 있다. 여기에 사용되는 CPU, 가속기, 인터커넥션 네트워크 등의 하드웨어는 대량 생산되어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범용 하드웨어(commodity hardware)다. 따라서 하드웨어를 잘 활용하기 위한 소프트웨어 기술의 개발이 더 중요하다. 이종 시스템 용 소프트웨어의 연구는 기술 선도국도 연구를 막 시작한 상태라서 같이 시작하면 우리도 충분히 차별화된 기술을 개발할 수 있다. 또 범용 하드웨어를 활용한 대규모 이종 시스템의 설계와 구성에 대한 연구도 연구비의 규모가 허용되면 선도국과 경쟁할 수 있는 분야이다.

하드웨어 쪽의 연구개발이 필요하면, 아직 슈퍼컴퓨터나 서버에 널리 쓰이고 있지 않더라도 향후 기술선도 및 국내개발 가능성과 차별성이 있는 프로세서를 고려할 필요도 있다. 또 국내에 성숙한 메모리 및 스토리지를 기술을 이용해 경쟁력 있는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일례로 이제 막 본격적으로 64 비트 서버용이 개발되어 출시되고 있는 ARM 프로세서를 들 수 있다. ARM 프로세서는 스마트 폰과 공개 소프트웨어에 의해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생태계가 국내 산업체에 잘 조성돼 있다. 일본이 개발해 2011년 세계 1위를 달성한 슈퍼컴퓨터인 K-computer도 많이 사용되지 않던 스팍 64 IP를 기반으로 하여 설계한 CPU를 이용했고, 일본 기업인 후지쯔에 의해 상용화됐다.

두 번째로, 기술이전을 받는 것보다 독자적인 기술개발에 집중해야 한다. 먼저 기술을 이전 받은 다음에 기술 자립화를 이루자는 생각을 쉽게 할 수 있지만, ICT 분야는 이런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나로호나 한국형 원자로의 경우와 다르다. 타 분야는 노하우라는 것이 존재하고 돈을 내면 이를 이전 받을 수 있지만, ICT 분야는 라이센스나 IP를 구매해 기술을 확보해야 한다. 상용 핵심기술의 라이센스나 IP는 판매하려고 하지 않는다. 소프트웨어의 노하우는 공개 소프트웨어에 충분히 녹아 있다. 국내에 잘 발달된 생태계나 기확보된 기술을 이용하고, 공개 소프트웨어를 기반으로 독자적인 기술을 개발하여 라이센스나 IP를 도출하는 것이 좋은 전략이다.

세 번째로 연구개발된 기술은 철저한 검증을 거치도록 해야한다. 슈퍼컴퓨터의 성능 순위를 열거하는 Top500과 전력효율 순위를 열거하는 Green500의 순위에 집착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이를 학력고사나 수능시험으로 생각하면 상황이 다르다. 시험에서 고득점이 실제 실력과 비례한다고 단정지을 수 없으나, 시험공부를 통해 실력이 향상된다. Top500과 Green500을 통해 자체개발 기술의 국제적인 가시성을 확보하자. 이를 통해 차별화된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었는지, 실제로 사용자가 잘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개발되었는지 검증하자.

마지막으로 자체개발 사업을 부족한 ICT 분야 고급인력 양성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것이 정부의 재난대응 프로그램이 없어서가 아닌 것처럼, 국내 소프트웨어 산업과 인력의 수준이 낮은 것은 좋은 커리큘럼과 연구개발 사업이 없어서가 아니다. 커리큘럼에 따라 옳게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고, 연구개발 사업의 취지에 충실한 고급인력 양성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기회를 잘 이용하여 연구인력을 올바르게 교육하자.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기술의 개발을 통해 문제 해결 능력이 배양된 고급인력을 양성하자.

자체개발 사업이 국책사업이란 미명하에 정부 출연연구기관의 연구비를 대기 위한 구실이 되고, 여기에 학계가 야합하면 배가 산으로 간다. 슈퍼컴퓨터 자체개발 사업을 통해, 언제인지 모르지만 예전에 우리가 꿈꾸던 기술 연구개발의 본질을 회복시키자.

이재진 서울대 매니코어 프로그래밍 연구단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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